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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보는 세계 여행

멸망한 도시들 중 손꼽히는 폼페이

by chairmans 2022. 12. 10.

1. 폼페이 소개

폼페이

대부분 이탈리아를 보러 가는 관광객들은 이탈리아 고대인들의 생활을 보러 폼페이로 갑니다.

나폴리부터 폼페이로 가는 길에는 항상 베수비오 화산이 따라다니는데

이건 제주도의 어디를 가나 한라산이 보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말은 이 지역 자체가 화산 폭발로 베수비오 화산 분출의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에서나 볼 수 있는 화산 폭발은 폼페이를 흔적도 남김없이 집어삼켰습니다.

그렇지만 우아한 곡선의 산세는 지금도 여전히 기품이 있고 우아해 보입니다.

 

베수비오 화산이 폼페이를 집어삼켰던 때는 기원후 79년 8월 24일이었습니다.

폼페이 너머로 베수비오 산이 불꽃처럼 번쩍이며 지독한 유황 냄새와 연기로 호흡조차 어렵고

죽음의 재로 공포와 절망을 느끼는 순간 폼페이는 그대로 폭발해버린 베수비오 산 폭발로

화산재가 되어 순식간에 없어져버렸습니다.

그 이후 1594년 잊혀갔던 폼페이의 폐허가 처음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물 찾기를 하듯 이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1754년 명문을 발견하게 되고 이 지역의 원래 이름이 폼페이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 당시 유럽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체계적인 발굴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세계적 문호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도적 같은 사람들에게 폼페이가 함부로 파헤쳐지게 되었고

고대 예술품이 다량으로 분실되고 파괴되었다고 쓰여있습니다.

 

그러던 중 1860년 젊은 고전연구가였던 주세페 피오넬리가 발굴 책임자가 되며 합리적인 발굴 시대가 도래하였고

기원전 10세기부터 형성되어 번영을 누렸던 도시 폼페이의 모습이 점차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굵은 쇠창살로 접근을 막아놓은 자료관에서 볼 수 있는 고대 사람들의 모습은 그날의 재앙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양편으로 늘어서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가재도구들로 그릇이나 화로 같은 것은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앙에는 순식간에 화석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모습들이 군데군데 진열돼 있습니다.

엎드려 있던 모습, 누워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려다 그대로 굳은 모습, 무릎을 껴안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

재난을 피하기 위해 두 팔로 멀리를 감싸 안아 엎드려 웅크리고 있는 모습 등

집안이나 거리에서 만난 재난의 그 순간들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폼페이 사람들은 2000년 전 그때부터 우마차가 다니기 편리하고

비가 오면 사람들의 발이 젖지 않도록 한 길을 만들었습니다.

비너스 신전과 법정 역할을 했다고 하는 바실리카, 아폴로 신전 등에 남아 있는 조각들과 그림으로 봤을 때

그들의 종교생활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로마 법의 영향으로 기강도 바로 서 있었을 뿐 만 아니라 낙천적인 기질로 신과 더불어 즐기는

생활의 질서 역시 확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해시계와 물시계로 근무 시간을 맞추고 법정의 개정 시간을 공고했다는 기록으로 봤을 때

상당히 앞선 문면의 혜택을 누렸던 도시국가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폼페이 목욕탕

폼페이 목욕탕

만약 폼페이를 관광할 때 한여름이라면 태양 아래 폼페이 때문에 더위에 고통스럽겠지만 

그 당시의 생활 모습을 이해하게 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는 유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중앙대 광장 목욕탕을 둘러보게 되면 목욕하고 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스치게 됩니다.

온탕 세면대 위에 둥근 천장에서 햇빛이 쏟아지는 모습 혹은 차가운 물이 콸콸 뿜어져 나온다는 대리석 탕을 보다 보면

그때 당시 폼페이 사람들에게 목욕탕이라는 공간은 정말 필수적인 시설물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거리에 설치되어있는 수도시설과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음향 효과를 지금도 훌륭하게 구실을 할 수 있다는

대극장 등을 둘러볼 때 그들의 앞선 문여에 대해 다시 한번 놀라게 됩니다.

 

폼페이 중앙 목욕탕은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할 당시까지 완공이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 목욕탕의 특징은 남탕과 여탕의 구분이 없다는 것과 온탕과 냉탕 등이 모두 하나씩이었다는 점입니다.

남성 전용이었거나, 특정된 시간에는 여성들만 이용이 가능했거나 남녀 혼탕이었다는 것으로 추정됩니다.